올해 전시의 출품작들은 대체로 조각, 사진과 영화라는 매체의 고유한 성격을 비교적 선명하게 유지하는 가운데 동시대 미술의 미학적, 사회적 논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먼저, 동일한 전시실을 양분하여 사용한 김민애와 이슬기는 작업 방식과 태도에 있어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작가의 개념과 설계도,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는 논리의 완결성이 중요한 김민애의 작업과 우연한 영감에서 시작하여 경험과 지식이 축적된 결과로서 작품이 완성되는 이슬기의 방식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각각의 작업이 성립되는 구조를 연역적, 귀납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동시대 미술의 중요한 요소인 협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방법적 차이를 보여준 이슬기와 정희승의 대비도 주목할 만하다. 이슬기는 전통 기술을 보유한 전문가들과 기술적 협업을 통하여 작품의 내용 자체를 완성시키는 방식을, 정희승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디자이너, 음악가와 함께 매체 간의 역할을 분담하는 방식의 협업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사회적으로 첨예한 이슈를 다룬 정윤석의 경우, 작품의 소재와 그 재현 방식에 대하여 일부 관람객이 적극적인 항의를 하면서 예술 작품의 윤리의식, 전시 작품에 대한 미술관의 책임과 역할 등의 문제가 논쟁점으로 떠올랐다. 예술에 대한 담론이 작품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해석과 비판, 그리고 반론의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제 막 시작된 이 논쟁이 앞으로의 예술 창작과 수용에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유의미한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올해의 작가상 2020」, 이사빈(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24, 26 쪽
조각의 범주가 인간의 몸에 대한 우리 자신의 불안과 환상, 호기심, 욕망과 혐오를 객체화하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은 그것이 거듭해서 돌아오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김민애를 움직이는 것은 인간과 사물 간의 진동보다는 그런 인간의 불안정성에 휘말려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된 사물 자체의 불안정성이다. 조각의 이념은 보통의 사물들을 조각적 속성이 결핍된 것으로 재정의하고 스스로 조각이라고 주장하는 사물들을 초조한 심판의 시간에 들게 한다. 나는 무엇이 되어야 했는가? 나는 달리 무엇이 될 수 있었나? 김민애는 이 같은 사물들의 실존적 질문을 연극적으로 상연하면서 조각을 우화적 대상으로 변모시킨다. 「기러기의 가호 아래」, 윤원화(시각문화연구자), 48쪽
전시공간에 반응하는 김민애의 방법론은 그 공간의 구조를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하여 어떤 ‘분신’을 구상하는 데서 시작한다. 일종의 거울 효과를 의도하는 것인데, 물론 그 거울이 공간의 구획된 형상을 있는 그대로만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거울은 김민애의 작업에서 드물지 않게 등장하는 소재이다. (…) 이를테면, 김민애는 어떤 대상을 그것의 이미지와 대면시키되 특수한 방식으로 바꾸거나 뒤집은 이미지를 내세워서 독특한 거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부정적 공간으로 인식되는 허공의 통로를 실증적 육면체로 반전시키거나 계단의 살을 발라내어 그 뼈대만을 마치 창문처럼 바꾸어 되비추는 거울 효과를 구사하는 것이다. 그의 비범한 ‘거울’은 거푸집이기도 하고, 엑스선이기도 하다. 「말줄임표, 여러 개의 마침표」, 김홍기(미술비평가), 61-62쪽
이슬기 프로젝트들은 모두 관조를 요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기능을 환기시키며 주어진 요소들이 마치 생명체처럼 진화하며 ‘형태’를 만들어나간다. 누비이불/추상화, 바구니 조각, 나무 체 조각, 놀이 조각 (바가텔) 등은 모두 기능성을 전제하는 조각 실천이다. 여기서 조각의 기능성은 직접적 ‘사용’보다는 우리와 세계를 연결하고 역사와 현재를 엮으며,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즉, 지속가능한 기술과 사라져가는 언어, 기억, 공동체의 관찰에서 비롯된 바구니 조각, 나무 체 조각, 이불 조각이 완성된 혹은 종결된 작품이 아니라 살아 있고 열려 있는 그래서 무언가가 도래할 ‘과정’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직조의 미학: 이슬기와 조각적 실천」, 김성원(전시기획 / 비평,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98쪽
네 개의 문은 각각 두 개의 문틀로 구성되고, 각 문틀에는 반달 또는 달의 일부 형태가 있어서, 집안에 있는 방의 덧문을 통해 보는 밤하늘의 별을 떠올리게 한다. 이슬기의 이불들이 우리 몸을 잠과 꿈으로 빠져들게 한다면, 여기 색칠된 문들은 기이하게도 우리 몸을 비유적으로 방의 공간에 빠져들게 한다. 그것은 밤의 내밀함 속에서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달토끼를 찾는’ 것이다. 몸의 내밀함, 특히 여성의 몸의 내밀함은 그것이 얼마나 비물질적인지와 상관없이 이 장치 안에서 집결되고, 그들의 존재는 지연된다. 1990년대에 녹음된 노년의 여성들이 부르는 ‘다리세기’ 민요는 공간에 리듬감을 부여하며 박자에 맞추어 관람하게 한다. 아이들이 마주 앉아 서로의 다리를 번갈아 끼우는 놀이를 하며 부르던 이 노래는, 다섯 개의 목소리로 반복되며 일종의 주문이 된다. 「 달토끼 찾기」, 엘피 튀르팽(CRAC 알자스 예술감독), 104쪽
?올해의 작가상 2020?에서 소개된 정윤석의 신작 다큐멘터리 ?내일?은 갑작스럽게 출현한 코로나19 바이러스처럼, 세계의 변화는 수면 아래에서 점진적으로 진행되지만 우리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한 채 하룻밤 자고 일어난 아침에야 갑자기 바뀌어버린 세계를 만나게 되는 것 같은 ‘내일’의 세계를 암시한다. 그 세계의 가장 암울한 그림은 성인용 인형, 인공지능 로봇과 같은 물질적 매개자의 변화 속도와 상호작용하는 기술적 변화의 영역에 인간의 자리가 비워지는 경우일 것이다. 인간이 만든 인공물과 기계가 인간을 배제한 채 비인간계의 독자적 세계를 만들어나갈 때 인간은 소외된다. 정윤석의 ‘내일’은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위험한 변화의 움직임을 직감하게 한다. 「비인간의 수면 아래…」, 김은희(독립큐레이터), 141쪽
작품은 공장에서의 한 직원의 일탈 문제에 관한 관리자의 말로 시작된다. 그 직원은 다들 알다시피 “좀 그렇”지만 여러분과 똑같으며, 내일 돌아올 것이며 언제나처럼 대하면 된다고 관리자는 다른 직원들을 안심시킨다. 어떤 일터에서도 종종 발생하는 사소한 사건이지만 하나의 결사체를 유지시키는 시나리오에 대한 믿음에 미세한 균열이 엿보이는 유일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어 직원들은 구호 문서를 함께 복창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외재화된 형태로 확인한다. “즐거움은 식량처럼 저장할 수 없고 와인처럼 오래 보관할수록 달아지지 않는다. 나는 미래를 위해 살지 않는다.” 언제나 나중에 실현될 것으로서의 (부가 가져다 줄) 행복을 믿음의 원리로 하지만 지금을 살라는 역설적인 구호다. 내일은 틀림없이 올 테니, 우리는 의심 없이 지금을 살아야 한다. 「‘내일’의 바깥에 설 수 있는가」, 안은별(미디어 연구자), 146쪽
벤야민은 한때 인용만으로 이뤄진 글을 쓰고자 했다. 나는 정희승의 신작에서 이 오래된 시도가 떠올랐다. 스물다섯 작가를 인터뷰하고 이와 관련한 이미지를 포착한 본 작업에는, 동시대 사상을 포집하고자 했던 저 방법론과 유사한 구석이 있는 듯하다. 따라서 나는 이에 발맞추어, 콜라주로 형상화한 ‘오늘의 작가’에게 몇 통의 편지를 쓰고자 한다. 「천연덕스럽게」, 조은비(큐레이터), 180쪽
작가가 관객에게 이야기의 재료로 제공하는 정보는 대단히 한정적이다. 이 사진들은 정희승이 자신의 동료 예술가들을 찍은 것으로, 그들은 한편으로 예술계 안에서 생존 투쟁을 벌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생활을 지탱하기 위해 악전고투한다. 이는 괴롭지만 드문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적잖은 관객들 역시 자신을 비슷한 인물로 가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범박한 일상을 견디고 있는 잠재적 예술가들, 자신의 내면에 작가의 정체성이 숨겨져 있다고 믿는 이들은 사실 산업사회의 전형적인 인물형이기도 하다.
또한 그 믿음은 사진이 되어 벽에 걸려 있는 작가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이 공유하는 일종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세계는 자신의 논리를 바탕으로 마치 쳇바퀴처럼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쿤데라가 말한 ‘카프카적’ 상황과 같다. 즉 세계는 거대한 미로와 같고, 한가운데 던져진 인간은 그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다. 제도 안의 인간은 탈출할 방법을 찾기보다는 막연한 불안에 사로잡혀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를 끊임없이 자문자답하며 자신을 벌준다. 「즐겁게, 즐겁게, 즐겁게, 즐겁게」, 김현호(사진비평가), 198쪽
국립 현대 미술관
1969년 경복궁에서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은 이후 1973년 덕수궁 석조전 동관으로 이전하였다가 1986년 현재의 과천 부지에 국제적 규모의 시설과 야외조각장을 겸비한 미술관을 완공, 개관함으로써 한국 미술문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1998년에는 서울 도심에 위치한 덕수궁 석조전 서관을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인 덕수궁미술관으로 개관하여 근대미술관으로서 특화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2013년 11월 과거 국군기무사령부가 있었던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전시실을 비롯한 프로젝트갤러리, 영화관, 다목적홀 등 복합적인 시설을 갖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을 건립·개관함으로써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국의 과거, 현재, 미래의 문화적 가치를 구현하고 있다.
또한 2018년에는 충청북도 청주시 옛 연초제조창을 재건축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를 개관하여 중부권 미술문화의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